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아주 슬픈 카지노 이야기 2화 (1~5) 펌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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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금 처럼 핸드폰이 있는 시절도 아니니 연락은 안되고... 이거 환장 할 지경 입니다.
혹시나 하고 호텔 프런트에도 알아 보았습니다.
지금도 그런지 몰라도 언제 체크 아웃 했나가 뭐 중요 하다고
신상 문제로 가르쳐 줄 수 없답니다.
말도 안된다고 따지다가 그냥 나왔습니다.
저녁에 케이와 두어번 간 신사동 뒷 길 이름도 잘 생각 안나는
동경 이었나 하는 나이트클럽에도 갔습니다.
웨이터는 금방 기억 하지요. 케이의 기이한 습관 때문에...
케이는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.
식당 가면 음식을 꼭 여러개 주문 합니다.
김치 찌게에 생선 구이,거기에 게장 백반등... 저랑 가면 두어개 또 추가 합니다.
이 버릇은 술집 가서도 나옵니다.
둘이 가면 아가씨 4명을 부릅니다.
한 번은 워커힐서 돈 좀 딴 날인데 남산 하이야트 호텔 밑 쪽에 어떤 요정 같은데 가서는
룸에 못 들어간 아가씨 다오라고 하여 12명 하고 술 먹은 적도 있습니다.
웨이터는 백만원 짜리 수표 맡겨놓고 간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안 온다고 합니다.
초저녁에 와서 술 한잔 하고 백만원짜리 수표를 내놓더랍니다.
그 거 저번에도 써먹던 수법 입니다. 전 알지요. 케이의 허세...
당시 백만원은 적지 않은 돈 입니다.(지금 시세로 천만원 혹은 그 이상 될 거 같네요)
나이트클럽에 그것도 이른 시간에 백만원 짜리 수표 내면 잔돈이 쉽지 않습니다.
웨이터가 잔돈을 못구해 쩔쩔매면 케이는 다음에 온다고 합니다.
뭐 써드린다고 하면 필요 없다고 하지요.
그 다음 부터 케이는 그 곳의 VIP가 됩니다.
그 친구는 그런 허세가 있지만 그의 진면목을 아는 저는 그저 웃습니다.
이것 저것 따져보니 케이가 서울서 일주일 정도 전 부터 안 보이는 듯 했습니다.
이건 서울서 김서방 찾기지 어떻게 찾아야 할 지 막막 했습니다.
하여튼 수표 맡겨 놓은 것도 있고 하여 저는 웨이터에게 제 호텔 연락처와
제가 없을 경우 프런트에 메모 남겨 놓을 것을 부탁 하고 나왔습니다.
한국에서 오래 있을 수 없는 저는 조바심 속에 시간을 보냈습니다.
닷새가 지나도 연락이 안오고 그사이 저는 워커힐 카지노와
나이트 클럽을 왔다 갔다 하며 케이를 찾았습니다.
일주일 안에 돌아가야 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.
케이가 돈도 꽤 많이 소지 한 걸 아는 저는 별 생각을 다했고
경찰서를 찾아가 신고 할 까 생각도 했습니다.
뉴욕 케이집에 전화 해보니 며칠 전에 한국서 잘 있다고 연락이 왔답니다.
저는 한시름 놓고 한국 어디엔가 있나보다 하고 뉴욕으로 돌아 갔습니다.
뉴욕에 오니 저 없는 동안 케이의 전화가 사무실로도 왔답니다.
그저 잘 있겠지 하는 스스로의 위안 속에 저는 제 일상으로
돌아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습니다.
한 두달이 지났나 케이가 뉴욕 제 사무실에 떡하니 나타났습니다.
이건 반가움보다 야속함이 더 컸습니다.
저한테 미안하고 잔소리 들으면 마음이 무겁고 그게 게임에
영향을 줄까봐 연락을 안 했답니다.
어디 있었냐고 물으니 부산과 제주도에 있었답니다.
지금도 그대로 이지만 해운대와 제주 그랜드 호텔에 파라다이스가
운영 하는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있습니다.
거기서 게임을 했답니다. 그 때서야 저도 아차 했습니다.
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요.
하여튼 회포를 풀고 술 한잔에 야속함을 떨쳐 냈습니다.
그게 친구 사이 아니겠습니까? 뭐든지 용서가 가능한 사이,
케이는 미국서 오래 사귄 유일한 친구 이니깐요.
저는 안심하고 제 일상에 바쁘게 지내는데 얼마 안지나 케이는 한국에 또 간답니다.
저번에 자기 때문에 한국에 온 것도 미안 하고 하여
경비 다 댈테니 저보고 같이 가자고 합니다.
저는 별로 한국서 할 일도 당시에 없고 하여 거절 했는데
며칠을 찾아 오며 사정 하다시피 하고
의리까지 내세우는 바람에 저는 할 수 없이 동행 하기로 했습니다.
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케이가 털어논 얘기는 저를 아연 실색 하게 만들었습니다.
서울서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사귀었답니다.
저도 한번 같이 자리하고 케이가 워커힐 카지노 안 쪽에 일반인
출입 가능한 식사 하는 자리도 데려 갔던 아가씨입니다.
국내인이 워커힐 카지노를 들어 갈 수 있는 한계인 바가 있는
그 곳은 카지노가 훤히 보이는 장소 이지요.
큰 손님은 VIP용 미디 테이블이 있는 카지노 안 쪽 까지 같이
게임은 못해도 내국인을 데려간다고 하는데
그 건 억대 플레이어 얘기이고 케이가 데려 들어갈 수 있는 한계는 거기 까지입니다.
그 아가씨는 케이보다 거의 열 살 가까이 아래이고 한데 케이는 그녀를 사랑 한 답니다.
원래 진짜 갬블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가 알기에도 이성 보다는
갬블에 더 매력을 느끼는데
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로 치던 갬블러 인 케이가 사랑을... 이건 말도 안됩니다.
그 녀와 해운대고 제주도를 다닌거 랍니다.
세살 연상의 와이프와 살 던 케이는 젊은 아가씨에게 무한 매력을 느끼게 된 것 입니다.
그러면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저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 입니다.
한국서 악세사리 공장을 할테니 자기 좀 도와 달랍니다.
당시 한국의 악세사리(특히 커스텀 쥬얼리) 공장은
어떤 큰 시설이 필요 한 것은 아닙니다.
사무실 차려놓고 달동네에 하청 주어 집에서 조립 하고 나면
도금 공장에 넘겨 도금 하고
제품 팩킹 할 장소만 있으면 될 정도인 오퍼상 수준이지요.
결국 케이는 그아가씨와 지내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 입니다.
전 단호하게 거절 했습니다.
케이는 절대로 이혼 할 생각 없고 그 아가씨를 도와 주고 싶어 그런답니다.
병드신 아버지에 홀로 집안을 이끄는 가장인 아가씨는
동생들 학비 대기 위해 일을 나왔답니다.
지금 생각하면 뻔 한 스토리인데 그 때는 그 걸 케이나
저는 순진하게 넘어 가고 받아 들인 거지요.
그래도 서울 가는 내내 반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.
케이는 이미 자기 어머니에게 한국 가서 공장 차리고 저희 회사에
제품 만들어 보내겠다고 하고나서 돈 준비까지 말해 놓았습니다.
케이 어머니는 케이가 와이프 네일 가게 셔터맨 (뉴욕서는 여자가 일하고
남자가 문열고 닫는 사람을 그렇게 부릅니다. 일명 샤따맨 이라고 하지요.) 하는 것을
못 마땅 하게 여겼으니 바로 승낙 하셨습니다.
케이의 끊임없는 간청에 저는 결국 몇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허락 했습니다.
이혼 절대 불가(케이는 본인 스스로 말하길 딸도 있고 돈 잘 버는
마누라와 죽어도 같이 갈 거랍니다)하고
사무실은 되도록 작게 차리되 우선 일을 배우고 진행 하라 하였습니다.
케이는 이미 공장을 돌릴 매니져감도 확보 하였다고 하며
걱정 말라고 하며 신나 했습니다.
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관계가 종말로 치닫는 시작이라는 걸 그 때는 몰랐습니다.
아니 시작은 케이와 제가 한국에 와서 워커힐 파라다이스 카지노에
발을 들여 놓았을 때 이고 그 때는 초기 과정 이었습니다.
정말 불행은 소리 소문 없이 야금 야금 찾아 옵니다.
우리가 느끼지 못하게 살살 오다가 어느날 갑자기 꽝 터뜨리죠.
무슨 폭탄 처럼...
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먹먹 합니다.
가슴 아픈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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